겉보기엔 액체. 알고 보면 반도체 수율을 책임지는 핵심 조연 그 이름은 바로 프리커서(Precursor), 우리말로는 ‘전구체’라고 부릅니다. 이는 반도체 소자 위에 ‘박막’을 얇게 깔기 위한 시작 재료로, 반도체 공정의 첫 번째 단계를 책임지는 고기능성 화합물이죠.
비유하자면, 반도체 제조는 집을 짓는 과정과 닮았습니다. 🏠
설계를 하고, 기초를 다지고, 하나하나 구조물을 올려가죠. 이때 벽을 이루는 재료가 바로 박막이고, 프리커서는 그 벽을 이루는 재료가 직접 뿌려져 형태를 이루는 ‘액체 콘크리트’ 같은 존재입니다. 프리커서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벽의 두께, 균일도, 밀도까지 달라지는 것이죠.
그런데 요즘 반도체는 단순한 벽이 아니라, 1nm 단위의 미세 벽돌을 정교하게 쌓아야 하는 수준이라, 프리커서 하나만 삐끗해도 공정 전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구매팀은 이제 단순히 재료를 조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재료를 사는 동시에 공정에 맞는 특성을 읽고, 기술팀·생산팀과 긴밀히 협의하며, 공급사와 사양을 조율하는 기술 브로커이자 전략 설계자의 역할을 수행하죠.
특히 SK트리켐은 CpHf, CpZr 등 고유전율 프리커서를 직접 개발하고 제조하는 회사로, 3nm 이하 반도체 공정에 적용되는 고성능 전구체를 글로벌 고객사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전구체를 만들기 위한 고순도 금속, 유기 리간드, 반응용 촉매는 누가, 어떻게, 어떤 기준으로 사올까요?
안녕하세요! SK머티리얼즈 취재기자 윤하영입니다.
오늘은 SK트리켐 구매팀 원부자재 구매 담당 전상우 PL님의 하루를 따라가며, 프리커서 제조의 출발점인 ‘소재 구매’ 직무의 실무와 전략을 들여다봅니다. 함께 가시죠!
SK Careers Editor 21기 윤하영
SK트리켐 구매팀의 하루는 엑셀 파일이 아닌 사양서에서 시작됩니다. 단순히 ‘무엇을 얼마나’가 아닌, ‘왜 이걸 지금 써야 하는가’를 묻는 일부터죠. 전상우 PL의 책상 위에는 오늘 검토할 CpHf(Cyclopentadienyl Hafnium)의 사양서와 도면이 놓여 있습니다.
원재료 하나의 스펙이 반도체 수율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특히 DRAM 공정에 사용되는 고유전율 프리커서들은 HfO₂, ZrO₂, TiO₂ 같은 계열이 많은데, 이들에겐 공통적으로 높은 순도와 극소량의 금속 불순물 관리라는 까다로운 조건이 따라붙습니다.
사양서를 보는 일은 단순한 수치 검토가 아닙니다. 이 숫자들이 실제 증착 공정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어떤 미세한 변수로 작용할지를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과정입니다. 공급사마다 수치 기준은 조금씩 다르고, 표현 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숫자 너머의 맥락을 파악해야 합니다.
때문에 전상우 PL은 사양서를 펼칠 때 공급사의 특성, 해당 공정의 조건, 그리고 이미 진행한 테스트 데이터까지 한꺼번에 떠올리며 판단을 시작합니다. 하루를 여는 문서 한 장에, 하루 종일 풀어야 할 고민들이 이미 녹아 있는 셈입니다.
기술팀과 함께하는 오전 회의. 이날 화두는 최근 공정 최적화를 위한 ‘One-pot Reaction’입니다. 기존엔 2~3단계로 나뉘어 있던 합성 과정을 한 번에 처리하는 기술이죠. 효율은 높지만, 문제는 휘발성과 열안정성 사이의 미묘한 균형입니다.
너무 잘 날아가면 공정 내 안정성이 떨어지고, 너무 안정적이면 원하는 증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죠. 이 균형을 숫자로만 이해하는 건 어렵습니다. 결국 데이터를 해석할 줄 알아야 하고, 공정의 전체 흐름을 이해해야 합니다. 구매팀은 단가나 납기만 챙기는 부서가 아닙니다. 어떤 자재가 공정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 그것이 다른 품목과 어떻게 맞물릴지를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전상우 PL은 기술팀의 회의에 ‘참석’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기획자’로 함께 앉아 있습니다.
공정을 모르면, 구매 전략도 짤 수 없습니다. 가격표와 도면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 데이터를 읽는 눈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오후 업무는 글로벌 공급사들과의 협의로 본격적으로 달아오릅니다. 테스트 결과 확인, 신규 샘플 요청, 사양 조건 검토까지 메일함이 쉴 새 없이 울립니다. 프리커서 원재료는 Lab → Split → Volume → Mass Volume까지 테스트 단계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확대 적용됩니다. 이 중 어느 한 단계에서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도입은 멈춰야 하죠. 일본 트리케미칼연구소는 그 중에서도 핵심 파트너 중 하나입니다. 양사 모두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 보니, 협의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이뤄집니다. 때로는 공급사, 기술팀, 품질팀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도 있고, 그 중간에서 구매팀이 조율에 나서야 합니다. 이런 협의에선 문서보다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전상우 PL은 필요하다면 직접 일본 출장을 갑니다. 현지 주재원들과 출퇴근을 함께하며 익힌 일본어 회화는 실제 협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곤 했습니다. 단어 하나, 억양 하나가 신뢰를 만드는 데 꽤 큰 영향을 주더라는 겁니다. 신뢰는 협상력보다 앞서야 합니다. 공급사와의 관계는 단가보다 긴 호흡으로 봐야 하니까요.
오후 3시는 조금 더 전략적인 시간입니다. SK트리켐은 자재마다 국적, 공급사 수, 당사 매출 기여도 등을 기준으로 ‘Risk Score’를 산정해 관리하고 있습니다. 리스크가 높다고 판단되는 자재는 ‘전략자재’로 분류하고, 장기계약(LTA)을 맺거나 최소 3개월 이상 재고를 확보하며 집중 관리합니다. 단순히 “재고 몇 개 확보했다”는 차원이 아니라, 공급 안정성을 정량화하고, 리스크별로 실행계획까지 갖추는 식이죠.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은 ‘개발 구매’, 즉 국산화 전략입니다. 기존에 해외 공급사에 의존하던 자재를 국내 기술로 대체하기 위한 작업인데요, 여기에는 단순히 기술이 되는지만 보는 게 아니라,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 가능한지까지 같이 봐야 합니다.
이에 구매팀은 기술력을 가진 중소·중견 협력사를 찾기 위해 전국을 누빕니다. 양산 경험이 부족한 기업이더라도, 개발 초기부터 함께 테스트를 설계하고 공급 체계를 구축해나가면서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습니다. 산업 생태계가 결국은 '함께 만드는 팀플레이'라는 점을, SK트리켐이 누구보다 먼저 실천하고 있는 셈입니다.
오후 4시 30분. 해가 어느덧 저물어가는 구간이지만 오히려 집중도는 최고조에 이릅니다. 테스트 리포트 속 예측과는 다른 수치 하나가 구매팀을 멈춰 세웠기 때문이죠. 유관 부서와 함께 데이터를 빠르게 정리하고, 이전 테스트와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공정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하나씩 짚어가며 원인을 좁혀 나갑니다.
문제 해결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공급사와의 미팅에서는 테스트 조건, 환경, 공정 사례 등을 공유하고, 필요하다면 현장 실사도 직접 나갑니다. 창고 온도, 설비 상태, 운송 중 흔들림까지. 이 모든 것이 변수입니다. 이후 개선된 샘플이 다시 도착하면 테스트는 반복됩니다. 최종 승인까지는 단 한 번의 확인도 가볍게 지나가지 않죠.
이런 대응 프로세스는 단순한 품질 관리가 아니라, 전사 공급망을 안정화시키는 핵심 전략입니다. 그래서 SK트리켐은 BCP(Business Continuity Plan, 사업 연속성 계획)를 시나리오별로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전쟁, 무역 분쟁, 공급사 사고 등 수많은 가능성에 대응할 수 있도록 대체 공급사 확보부터 외부 재고 파악, 자재 사용 가능 기간 분석까지 빈틈없이 준비합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엘리베이터 앞에서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프리커서 구매 직무를 잘 수행하려면 어떤 역량이 필요할까?’
전상우 PL은 유기합성에 대한 이해를 가장 먼저 꼽습니다. 원재료가 어떤 조건에서 반응하고,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 원재료 공급사와의 협의와 대응이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술 이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결국 일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통해 하는 것이고, 구매는 이런 ‘만남’이 실무적으로 가장 많은 부서이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공급사, 기술팀, 생산팀, 품질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 사이에서 서로 다른 우선순위를 조율해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역량이 중요합니다.
SK트리켐은 그래서 모두를 ‘PL(Project Leader)’이라는 직함으로 부릅니다. 이는 구성원들이 각자 맡은 업무에 대해 본인이 리더라는 마음가짐으로 업무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맡은 이 업무에 대해서는 내가 리더고,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전문가’라는 마음가짐은 자발적이고 의욕적인 업무 추진을 통해 빠른 의사결정과 다양한 아이디어 발굴이 가능하게 만들어줍니다.
리더를 결정하는 요소는 자리가 아니라 태도라는 걸, SK트리켐의 리더들은 몸소 증명하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하루는 마무리되지만,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단순한 인터뷰가 아니었습니다. 기술을 읽고, 리스크에 대응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신뢰를 쌓아가는 구매 직무는 숫자와 논리를 넘어서 전략과 감각, 그리고 깊은 공감 능력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SK트리켐 구매팀의 하루를 따라가며, 여러분도 그 속에서 기술형 구매자의 진짜 모습을 가까이서 마주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아직 이 길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선택의 단서가, 또 누군가에게는 방향의 확신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의 엘리베이터 앞 질문에 자연스럽게 대답하며 미소 짓고 계실 여러분을 기대하겠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소중한 이야기를 나눠주신 SK트리켐 전상우 PL님께 감사드리며, 다음 기사에서 더욱 유익한 정보로 찾아뵙겠습니다.